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 제국 (문단 편집) === 철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Frontier-Mail.jpg|height=3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200px-India_railways1909a.jpg|height=300]]}}} || || '''{{{#FFF 영국이 인도에 설치한 철도}}}''' || '''{{{#FFF 인도 제국의 철도 지도}}}''' || 영국은 19세기 말부터 인도 전역에 철도를 깔았고, 이는 세계에서 4번째로 긴 규모였다. 초창기에는 모든 철도들이 사유재산이었으며 인도인이 철로를 소유하고 있는 경우는 아예 없었다. 고급 기술자와 운영자 역시 모두 영국 백인들이었고 인도인들은 오직 막노동꾼들 뿐이었다. 인도 식민정부는 영국의 부유한 자본가들에게 토지를 제공할 테니[* 인도 식민정부는 '자유토지'를 구매했다고 선전했으나 그 '자유토지'의 실상은 대부분이 마을의 공유지나 행정체계에 미숙한 인도인들이 신고하지 않은 땅이었다. 게다가 그 '구매'할 때 쓴 예산 역시 영국 본토의 세금이 아니라 [[인도]]에서 거둬들인 세금이었다.], 인도의 철도 건설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고 최소 매년 5%에 달하는 수익률을 제시하면서 영국 자본시장으로부터 막대한 자본을 끌어오는 데에 성공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철로들은 모두 기업들의 소유였고 최소 99년 간 임대하면서 상당한 양의 수익들을 챙겨갔다. 당시 인도에는 크게 2개의 철도 회사가 있었다. 하나가 '대인도반도 철도회사(GIPR)'였고 나머지 하나가 '동인도 철도회사(EIR)'이었다. 이들은 1853년에 봄베이와 캘커타를 운행하는 열차를 처음으로 개설했고, 1859년에는 알라하바드와 칸푸르를 연결하는 첫 승객용 열차를 개통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총 5개의 대규모 철도회사들이 인도의 철도시장을 갈라먹는 형태가 되었으며 이 5개의 철도회사 모두가 백인 소유의 영국 회사였음은 당연하고 모두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방식으로만 운영하였다. 정부는 이같은 운영에 아무런 제동을 걸지 않았고 기업들은 정부의 방관 속에 인도인들의 고혈을 짜내가면서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에만 치중하였다. 1854년에는 달후지 경이 인도의 지방 도시들까지 촘촘하게 철도망들을 건설한다는 장대한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에 힘입어 영국 본토에서 막대한 자본을 들여와 철로들을 깔아대면서 인도의 철도망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삼 주와 라자스탄 주 등이 독자적인 철도 체계를 가질 정도로 철도들이 많이 깔렸고, 1860년부터 1880년 사이에 인도의 총 철로 길이는 1,349km에서 25,495km로 급격하게 증가했다. 이 철도들의 대부분은 3개의 대도시인 [[봄베이]]와 [[마드라스]], [[콜카타|캘커타]]를 잇는 산업용 열차였다. 게다가 1857년의 [[세포이 항쟁]] 이후 영국 당국이 이 철로를 반란지대로 병사들을 빠르게 이송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기게 되면서 철도들은 1900년대까지도 꾸준하게 증가했다. 철도의 주 목적은 석탄, 철광석, 면화 등을 본국으로 수출하기 위해 항구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영국인들이야 1등석 혹은 2등석에 앉아서갔으나 인도 현지인들이 타는 3등석은 시설도 위생도 최악이었다. 오죽했으면 당시 영국인들도 인도인 객차들의 상태가 지나치게 관리를 안한다고 한탄했을 정도. 철도회사에 고용된 인도인도 없었다. 모든 기술은 오직 백인 남성에게만 한정되었고 인도인들에게 기술을 넘겨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인도 철도역.jpg|width=100%]]}}} || || '''{{{#FFF [[뭄바이|{{{#fff 뭄바이}}}]]의 빅토리아 역[* 이 역은 인도가 독립된 이후에도 버려지지않고 현재 '차트라파티 시바지 역'으로 개명되어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 대부분의 철도 관련 기술들은 [[영국]] 기술자들이 독점하고 있었으며 주요 목적 역시 [[인도]]에서 생산한 물건들을 [[유럽]]으로 보내기 위해 [[항구]]로 실어나르거나 영국의 필요에 따라 병사들의 이동할 목적이었다. [[인도인]]들은 함부로 철도를 쓰지도 만들지도 못했으며 백인 일색의 정부와 기업들의 결탁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효율성을 위해 1923년에 대인도반도 철도회사와 동인도 철도회사의 철도들을 모두 국유화했으나, 운영은 여전히 회사에게 맡겼고 대기업들은 폭압적인 경영 원칙을 그대로 유지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철도 노동자들의 권리 역시 제대로 지켜질 리가 없었다. 영국 식민정부가 신경쓰는 것은 오직 본토 출신의 노동자들이 징징대는 것뿐이었고(사실 영국 본토의 노동쟁의를 기관총으로 진압하던 게 고작 수십년 전인 시대였다) 정작 죽어나가는 인도인들의 고충은 무시하거나 통계상의 수치 정도로 취급했다. 정부는 인도 철로 관련한 사업들은 모두 [[런던]]에 있는 사무소에서 정부의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근본적으로 인도 현지 자본이 철도 산업계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면서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그대로 실시했다. 영국의 일부 식민주의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면서 내세우는 것이 바로 이 철도의 건설이다. 주로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며 철로를 건설하고 일자리들을 제공하면서 [[인도인]]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요지인데, 영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 기술자들이 그랬듯이 인도인들에게는 절대 핵심 기술을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정작 인도인들은 온갖 험한 대우를 받으며 백인 노동자들에 비해서 훨씬 극악한 환경 속에서 적은 임금을 받고 노가다 일했다. 게다가 철로 역시 주로 군수물자 수송과 병사 운송, 아니면 물자 침탈 등 주로 인도인들에게 좋을 것 하나없는 목적으로 가동되었고, 철도회사들이 오직 이윤만을 노린 자유지상주의식 경영을 했기에 말그대로 인도인들의 경제를 망가뜨린 주범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인구 폭증으로 인한 식량 문제 등으로 인하여 중국의 [[쿨리]]처럼 수많은 인도인들이 해외 노동자로 나가서 일하였고 이들은 중국 [[화교]]처럼 [[모리셔스]], [[피지]], [[가이아나]], [[수리남]], [[트리니다드 토바고]] 등에서 정착하여 인도 교포가 되었다. 사실 인도의 철도 건설은 복합적인 면이 존재하며 하나로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운 면이 분명히 있다. 영국은 분명히 인도의 풍부한 물산을 본토로 빼내기 위한 목적으로 철도를 깔았고, 빠르게 군대와 군수물자들을 인도 곳곳으로 이동시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철도를 깔았다. 애초에 철도 증설의 목적이 인도의 착취에 있었던 것이다. 허나 철도 건설은 인도 내부에서의 물산 이동량을 증가시켰고, 상대적으로 고립되어있던 인도의 시장을 하나로 묶어내었다는 효과도 가져왔다. 물론 그러한 장점들은 영국의 수탈량에 상쇄되었고 '''결과적으로는 인도에게 마이너스 효과'''를 불러왔을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